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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의 꿈의 구장/Footballers

김치우,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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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저녁 7시 수원월드컵경기장. 수원은 전반 16분 터진 하태균 선수의 선제골을 잘 지켜내 전남에게 1-0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날 경기로 5연승을 거둔 수원은 2위에서 1위로 올라가며 성남을 승점 2점 차로 따돌렸지요.


 
경기 종료 후 라커룸으로 들어가던 선수들 틈에서 김치우 선수를 발견했습니다. 다가가서 괜찮냐며 인사를 할까 잠시 고민했죠, 하지만 이럴 땐 그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반 16분 김치우 선수는 문전 앞에서 에두 선수가 올린 공을 헤딩으로 걷어냈습니다. 그러나 그 공은 참으로 무심하게도 페널티에어리어 왼쪽에 있던 하태균 선수 앞으로 떨어지고 말았죠. 하태균 선수는 침착하게 오른발로 발리 슈팅을 때렸고 결국 그 골은 결승골이 됐습니다. 본의 아니게 어시스트라도 한 것처럼 된 그 상황이 그에겐 편하지 않았겠죠.


가만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김치우 선수가 먼저 고개 숙이며 인사했습니다. 땀에 젖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던 중 저를 발견했나봅니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내밀며 제게 악수를 청하더군요. 그 순간, 잠시 잊고 있었던 2년 전 겨울이 생각났습니다. 맞아요. 그때도 그는 제게 그랬죠.


2005년 12월 4일 일요일 울산문수월드컵경기장. 그날은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 열린 날이었습니다. 당시 인천은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1-5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스페인에서 돌아와 후기리그부터 합류했던 이천수 선수는 그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그해 K-리그 M.V.P를 수상하기도 했죠. 물론 2차전에서 인천은 절치부심하며 라돈치치 선수와 임중용 선수의 연속골을 앞세워 2-1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러나 골 득실차로 우승컵은 울산에게 돌아갔습니다.


경기 종료 후 인천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라운드에 누웠습니다. 노장 김학철 선수는 엉엉 소리 내며 울었고 최효진 선수 역시 좀처럼 눈물을 거두지 못했죠. 장외룡 감독은 괜찮다며 최효진 선수의 어깨를 감싸며 달랬지만 그는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천의 젊은 피였던 이요한 선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죠. 시상식대 위에서도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힘들게 눈물을 참고 있었습니다.


기쁨과 슬픔이 혼란스럽게 얽힌 그 현장에서 김치우 선수를 만났습니다. 그라운드 위에서는 수많은 기자들이 취재 경쟁 중이었고 저 역시 그런 경험은 처음이라 다소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김치우 선수 역시 그랬겠죠. 더구나 바로 앞에서 우승이라는 꿈을 놓치고 말았으니 경황조차 없었겠죠. 그러나 김치우 선수는 그 와중에도 고개 숙여 인사하며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경기 내내 끼고 있던 장갑까지 벗으면서요.


다음 해 겨울 저는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2006 홍명보 자선축구 전야제 행사가 열렸던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이었죠. 당시 행사장 앞에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꽤 많은 축구 선수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화장실이 행사장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선수들은 팬들에게 둘러싸여 행사장에 쉽게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김치우 선수 역시 화장실에 다녀온 뒤 입구 앞에서부터 팬들에게 잡히고 말았죠. 그러나 그는 여느 선수들과는 달랐습니다. 황급히 사라지던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그는 자신에게 종이를 내민 팬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줬습니다. “사진 찍게 웃어주세요”라던 팬들의 요청도 들어줬고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행사장에 다시 돌아온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팬들의 사인을 다 해줬어요? 대단하세요.” 그러나 그는 오히려 제게 반문했습니다. “어떻게 저를 좋아하는 팬들을 뒤로 한 채 그냥 갈 수 있겠어요?”


그러고 보면 그는 종종 저의 우문에 현답을 내놓으며 저를 놀라게 만들곤 했습니다. 언젠가 “축구가 어떤 존재냐”는 질문에도 그는 이렇게나 멋진 대답을 해줬답니다. “축구는 저에게 학교 같은 존재죠. 축구를 통해 모든 걸 배웠으니까요. 그러면서 어엿한 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어요. 열여섯 이후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엄마가 돌아가셨거든요. 세상을 다 잃은 것만 같았죠. 그렇지만 그 순간에도 내 옆에 있었던 건 축구공이었어요. 그래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건 바로 축구에요. 그리고 이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요. 네, 지금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지난 해 올스타전에 처음 뽑혔을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올스타전에 뽑혔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누가 가장 기뻐하던가요?”라는 물음에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의외라며 “부모님은요?”라고 다시 물어봤습니다.


 
“엄마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암이었어요.”  예상 밖의 대답에 깜짝 놀라며 무슨 말로 그를 위로해줘야하나 잠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괜찮다며 자신이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해 숨김없이, 그리고 담담히 말해줬습니다.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 엄마가 많이 반대하셨어요. 어렸을 때 천식 때문에 몸이 약했거든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2년 동안이나 병원에 다녀야만 했어요. 항상 엄마가 돌봐주시며 신경 많이 써주셨죠. 중학교 입학 전에 비로소 천식이 나았어요. 그러면서 뛸 수 있게 됐죠. 뛸 때마다 숨이 찬다는 그 느낌이 정말로 좋다는 사실도 알게 됐어요. 요즘도 C.A라고 하나요? 5학년 때 특별활동을 해야 했는데 뛰는 게 좋아서 축구부에 들어갔어요. 정식 축구부는 아니었지만 마침 담당하셨던 선생님이 축구선수 출신이셨어요. 선생님께서 ‘풍생중학교에서 축구부원을 모집한다고 하니 한번 지원해봐라. 내가 볼 땐 잘될 것 같다’ 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제 축구인생도 시작된 거죠. 물론 엄마는 계속 반대하셨어요. 그 때문에 ‘만약 몸이 힘들면 그만해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저도 제가 이렇게 끝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프로선수가 될 줄 몰랐고, 올스타전에 뽑히게 될 줄도 몰랐고요. 할머니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하늘나라에서 엄마가가 얼마나 좋아하겠냐면서요. 사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만해도 저는 게임 못 뛰는 선수였거든요. 어렵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예요. 엄마도 그때는 모르셨겠죠. 제가 이렇게 될 줄은요.”


“보통 게임 뛰기 전에 국민의례를 하잖아요. 저는 그때마다 엄마를 생각하며 기도해요. 게임이 끝나면 다시 한 번 감사기도 드려요. 엄마 덕분에 무사히 게임 마쳤다고. 엄마는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신 분이자 지금도 저를 이끌어주시는 분이에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됐지만 제 마음 속에는 항상 엄마가 계시니까 같이 뛰는 거라고 생각해요. 엄마도 보실 거예요. 제가 이렇게 열심히 뛰는 모습 말이에요. 그래서 아쉽다는 생각은 없어요. 오히려 기분 좋을 뿐이에요. 지금도 날 지켜보고 계시니까요.”


그는 굳이 그 시간들을 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하려 하지도 않았고요. 그때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치우도 없는 것이니까요. 김치우 선수는 무엇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감추려 하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 제게 들려줬죠.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진짜로 제가 제일 불쌍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힘들 때만 잘 버티면 또 괜찮잖아요. 이 세상에는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저는 진짜 축구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거에요. 그래서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그의 지난 날을 알고 있는 제게 그 모습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던 꿈이 없었다면 그는 현실에 절망하며 그냥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죠. 꿈꾸던 소년이 이제는 다른 누구가에게 꿈같은 존재가 됐다는 사실이 저에겐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죠. '그리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 속에 놓여 있어야만 하는지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께 들려주려는 이 이야기에는 김치우 선수가 보낸 스물 다섯 해 인생 모두가 담겨져 있습니다.

“엄마 냄새 생각나요?”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잠시 침묵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엄마 생각은 나요. “치우야”하던, 5월의 남해를 닮은 그 목소리와 그때마다 눈초리에 지던 잔주름까지요. 하지만 엄마 냄새는 자꾸 잊혀지는 것만 같아요.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면 늘 불안해하며 울던 나였는데 말이에요. 꼭 엄마 손을 잡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곤 했는데 말이에요.


그날, 엄마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던 그 밤, 모두가 엄마를 잊는다 해도 나, 치우만은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렇게 내 삶의 시간이 멈추는 날까지 잊지 않겠다고 했는데. 시간은 참 야속하게도 내게 망각을 선물하고 말았네요. 그래서 요즘은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나요. 그때 난 천식과 싸워야했죠. 그래서 체육시간에도 늘 스탠드에 앉아 뛰어노는 친구들을 구경해야만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달릴 수 있게 됐어요. 다리가 불편했던 검프가 보호 장비 없이 달렸던 것처럼 말이에요. 네, 맞아요. 천식이 드디어 나았거든요. 그때 달린다는 기분을 태어나서 처음 느낄 수 있었어요. ‘숨이 찬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하는 생각도 처음 들었고요. 쿵쿵쿵 뛰는 내 심장이 나는 그저 좋았어요.


이렇게 뛰는 즐거움은 나를 곧 축구의 세계로 인도했죠. 물론 키도 작고 체력도 약했던 나에게 축구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체력훈련 때마다 ‘헉헉’대며 뒤쳐질 수밖에 없었죠. 합숙생활 중에는 선배들에게 이유 없이 맞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당시 풍생중학교 뒤편에는 1,000개의 계단이 있었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모두가 잠든 새벽, 조용히 일어나 그곳에 갔습니다. 계단 끝에 올라가면 저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어른거렸습니다. 엄마가 계신 분당이 있는 곳이었죠. 그때마다 나는 엄마를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중학교 입학할 당시 엄마는 많이 아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엄마는 위암 말기였다고 합니다. 거동도 쉽게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시합이 있는 날이면 늘 경기장에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가 뛰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대기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해 벤치에 앉아 있던 내 모습만 보셨죠.


지금도 할머니는 그 점을 가장 안타까워하십니다. “애미가 살아있었다면 치우 네가 국가대표가 돼서 뛰는 모습을 봤을텐데…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겠니”라면서요.


생각해보면 중학교 1학년 당시 나와 친구들은 참 많이도 맞았습니다. 주로 선배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맞을 때가 많았죠. 기합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그랬습니다. “이렇게 있을 순 없어. 우리 도망가자!” 이야기 도중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우리 집에 가자. 아빠한테 다 이야기해놨거든? 너희들 우리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줄게.” 그곳이 어디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다만 시골이었다는 사실만은 기억납니다. 서울에서 버스로 한참을 가야만 했거든요.


그러나 버스에서 내린 우리를 반겨준 사람들은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었습니다. 당시 마을 이장이었던 친구 아버지는 우리를 잡기 위해 이미 동네 사람들을 총출동시킨 상태였습니다. “저 놈들 잡아라!”하는 소리에 우리는 일제히 “튀어!”라고 소리치며 도망갔습니다.


15명의 친구들은 어느새 뿔뿔이 흩어졌죠. 그런데 다시 서울에 가기 위해선 다시 읍내로 가야했습니다. 지나가던 용달차를 얻어 탄 덕분에 다행히 읍까지는 쉽게 갈 수 있었죠. 하지만 경찰들은 이미 읍내에 쫙 깔린 상태였습니다.


“아, 어떡하지? 우리?” “일단 숨어있자. 좀 잠잠해지면 다시 나가던지 하자.” 친구와 함께 어느 초등학교 풀숲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한 30분가량 있었을까요.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뒤통수를 아주 세게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찰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와 친구 손에 수갑을 채운 뒤 강제로 경찰차에 태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왜 병원에 있던 엄마 생각이 났던 것일까요. 엄마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우리 엄마는, 이제 겨울날 볼 수 있는 나무들처럼 앙상해졌어요, 너무 작아져 버렸죠. 그래서 이젠 엄마 가슴에 안길 수 없게 됐어요. 엄마가 너무 작아져서요. 아니, 엄마에겐 이제 나를 안아줄 힘조차 없어요.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엄마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울었습니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보다 더 크게 꺽꺽거리며 울었습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경찰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며 “이놈아, 그렇게 걱정할거였으면 왜 도망가냐? 감옥 안가니까 고마 울어라!”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가도 좋았어요. 엄마만 살 수 있다면. 정말로 나는 괜찮았어요.


중학교 3학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엄마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새벽 운동을 하고 있던 난 아침도 거른 채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죠.


엄마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독사과를 삼킨 백설공주 같은 모습으로요. 하지만 백설공주 같은 엄마에겐 왕자님 따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었으니까요. 그때 나는 너무 어렸습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엄마 손을 잡아주는 일 뿐이었습니다. 단지 그것 뿐이었습니다.


문득 전날 밤 엄마가 내게 했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가, 마지막으로 네 아빠를 꼭 한번 보고 싶구나, 라던 그 말씀이요.


 
“아빠, 엄마가 많이 아파요. 아빠가 보고 싶다고 하는데 병원 좀 와주세요.” “싫다.” “아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고 하잖아요. 제발 한 번만요. 네? 한번만 병원에 와주세요. 엄마가 아빠 보고 싶다고 하잖아요. 피 토하면서 말했어요. 세숫대야 위로 피를 토하면서도 아빠가 보고 싶다 말했어요. 그러니까 제발요. 아빠, 제발 부탁이에요.” “싫다. 들어가서 운동해라.”


10년 전에도 강남역 지하상가에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혼자였고 눈물을 쏟으며 병원으로 되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 아빠가 바쁘대. 그래서 당장은 시간 내기가 어렵대. 그렇지만 일 덜 바빠지면 꼭 한번 병원 찾아온다고 그랬어. 좀만 기다리면 아빠 볼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자.”


엄마의 대답은 눈물이었습니다. 나의 거짓말을 이미 눈치 챘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그렇게 흐느꼈는지도 모르죠.


“왜 울어?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아빠 같은 사람이 뭐가 보고 싶어? 엄마는 정말 바보야! 엄마 미워!”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그렇게 한참동안 내뱉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생은 길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의 순간들 역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날만큼 후회스런 날이 살면서 또 있을까요.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없겠죠.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그날 난 할아버지와 함께 새벽 동이 틀 때까지 꼬박 밤을 샜습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잠들면 안 되는데… 왜 이러지….’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았죠. 잠을 쫓기 위해 나는 병실 밖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병실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치우야, 빨리 와라! 엄마가… 엄마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어느새 의사 선생님은 엄마 가슴에 붙어있던 심전도 리드를 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하얀 병실 이불을 곱게 덮은 채 천사 같은 모습으로 잠들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저녁까지 넋을 놓은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은 그날 밤부터 터져 나왔습니다. 너무 울어 온몸의 수분이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죠. 그렇게 나도 증발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하룻밤은 눈물과 함께 지나갔고 나머지 이틀은 깊은 잠과 함께 흘러갔습니다. 이틀을 내리자고 일어났더니 친구들은 어머니 관을 들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아빠가 나를 보러 왔습니다.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다면서요. 아빠 옆에 있던 한 여자는 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엄마는 아빠를 미워하지 마라 하셨지만 왜 내게 그런 말씀을 하고 떠났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 내게 가족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사람 뿐입니다.


올 초 인천에서 전남으로 이적할 당시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았습니다. 욕을 하는 팬들도 많았죠. 돈이 그렇게 좋냐며 조롱하던 이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들에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나 봅니다.


프로행을 결정했을 당시 많은 구단에서 영입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고 싶었던 팀은 단 하나, 인천뿐이었습니다. 그곳에 엄마 산소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인천에 있을 적엔 일주일에 두 번 씩 꼭꼭 엄마를 보러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때처럼 자주 갈 수 없게 됐네요. 지난 설에 찾아뵙게 마지막이니 벌써 6개월이 지났습니다. 꿈속의 나는 엄마를 보기 위해 이렇게 매일 같이 인천으로 달려가는데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엄마에게선 늘 제비꽃 향기가 났던 것 같습니다. 제비꽃은 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 같지만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살펴봐야지만 겨우 만날 수 있습니다. 엄마도 그렇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있을 것 같지만 꿈에서만 만날 수 있고, 그것도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 때만 만날 수 있으니까요.


제비꽃의 꽃말은 겸양과 성실입니다. 엄마는 그 꽃말처럼 늘 내게 겸양과 성실을 갖춘 선수가 되라 했습니다. 어느새 엄마가 내 곁을 떠난 지도 올해로 10년 째네요. 그날로부터 10년 째 축구를 하고 있지만 나는 아직 그런 덕목을 갖춘 선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비꽃 향기를 잊지 않는다면, 그 향기와 함께 실려 오는 엄마 목소리를 기억한다면, 언젠가는 꼭 겸양과 성실을 갖춘 선수가 될 수 있겠죠.

어머니, 사랑합니다.